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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http://blog.naver.com/betterlife65/220698883764

 

[강의 내용 설명]

성인기가 무려 이렇게 길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성인 초기, 성인 중기, 성인 후기 이렇게 나눈 것입니다. 성인 초기는 지금으로 얘기하면 대학생 때 부터 중년기 전 까지 라고 보고 있는데 사실은 중년기도 바뀌어야 합니다. 융 같은 사람은 중년기를 35세 까지로 봤습니다.

그러면 언제가 중년기의 시작일까요? 융은 중년기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인데 융은 인생을 오전과 오후로 나누었습니다. 어쩌면 정오부터 내 인생이 저물기 시작한다고 느낄 때가 중년기입니다. 주관적으로 나는 이제 내 인생에 정점을 찍었구나, 나는 이제부터 저물어 가는구나, 하산을 하는구나 이런걸 느낄 때가 중녠기라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35세, 40세 라고 얘기 했지만 지금은 ×0.7 하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요새는 60세도 중년기 아닙니까? 사실 70~80세 까지도 Yong Old 라고 하는 지경이 되었고, 90이나 되어야 완전 노인이다 하지, 인생이 피곤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이를 먹어도 일을 그만둘 수도 없고 계속 뭔가를 추구해야 되고, 그냥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게 과연 축복인지 대단히 의문입니다.

의학하시는 분께 물어보니 의학의 발달로 인해서 나이가 많이 드는 것이 과연 축복인가, 의학의 관심은 모르겠습니다. 죽을 땐 죽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단 순간에 죽게하는 것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습관적으로 주기를 숫자적으로 끄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어떻게 죽어야
하는 것이 굉장한 과제인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상 그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과정을 혼자서 많이 겪어 봤다는 것이 굉장히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혼자 가는 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숙의 지표는 내가 늙어가는 것과 죽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날 현대 문명은 명백히 이런 성장과는 반대 됩니다. 인간은 늙으면 머리 염색해야 되고, 성형 수술을 해서 젊어 보여야 됩니다. 젊음과 미모를 훨씬 더 가치있게 쳐주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게 성숙의 지표입니다.

중년기 때 인생의 오전과 오후에서 인생이 간다는 걸 느끼는 때가 중년이다, 중년기 때 위기가 온다고 그러면 흔히들 바람을 피웁니다. 근데 이것을 뒤집어 보면 내가 늙어감과 죽어감을 가장 쉽게 부정하는 방식이 젊은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늙어감과 추함과 죽어감을 잊는 것입니다. 중년기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정체성 실험을 안한 사람들은 다시 말해서 위기 의식을 안 가지고 정해진 길로 순탄하게 온 사람들은 중년기 때 새롭게 정체성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빠 말대로 의사가 됐고, 판사가 됐는데 이게 내가 행복한 것인가, 하나도 안 행복하다 라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뾰족한 수는 없고 나이는 많고 새로 학교를 다닐 수도 없고 그런데 제일 쉬운 방법이 잠시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청소년기 때 위기와 중년기 때 위기가 어쩌면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 기 때부터 정체성 씨름을 정직하게 한 분들은 중년기에도 아 나는 늙어가는 구나, 죽어가는 구나를 어쩌면 수용할 수 있으련만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은 정말 몸부림을 칩니다.

황혼 이혼도 많습니다. 그것은 일생 내내 살다가 이제라도 내가 내 숨을 쉬고 살겠다는 취지이기도 하고, 그 다음에는 중년기 이혼이 많은데 예를들면 60세, 55세 때는 이때껏 살았는데 이제와서 새 인생 팔자 필까 싶지만 그 마음에는 이제라도 내가 내 뜻대로 한번 살아보겠다는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이혼의 사유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변심이 사유 입니다. 사실 이혼하는 커플들의 경우를 보면 우리는 처음부터 잘못 만났다, 선택을 잘못했다 이런 말도 많이 합니다.

* 인간의 욕구

1) 생존의 욕구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욕구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내가 싫은 일인데도 할 적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는 일이 지긋지긋 해도 하는 이유는 돈을 법니다. 1번이 생존의 욕구입니다. 생존을 안 하면 나머지는 다 사치입니다. 내가 당장 먹고 살게 없다면 마음의 고통이나 트라우마 등은 사치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존의 욕구가 1번입니다.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문주의 심리학자인데 매슬로우도 1번을 생리적 욕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먹고 살아야 되고, 자야 되고 입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누구도 생존의 욕구가 1번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일이 지겨워도 생존의 욕구 때문에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힘의 욕구
그 다음에는 힘의 욕구가 있습니다. 힘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내가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어쩌면 정치, 권력의 마력이라는 것은 굉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 한번 맛을 들이면 그게 없이는 내가 정체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해서라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아주 평범한 사람들, 가진 돈도 배운 것도 없고 별 볼일이 없다 이런 분들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에게 나도 모르게 내 힘을 행사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 만큼은 내 왕국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는 말단 직원 일지라도 집에서는 내가 가부장적 횡포를 부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이 권력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집에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든 충족이 안되면 어디서라도 풀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폭력적인 가정을 우리는 그런 가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제일 큰 부분은 폭력적인 아빠를 보고 자랐을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아빠가 자식을 때리거나 엄마를 때리려 한다, 그러면 자랄 때 나는 우리 아빠같은 사람은 절대로 안 될거야, 나는 우리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하면서 컸을 지라도 나도 모르게 똑같은 아빠가 되어 있을 수 있는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어떤 남성들은 여성들에게는 이 파워 욕구가 없는 줄 아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성들 파워도 무섭습니다. 여성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파워 욕구가 어디서든 만족이 되어야지만 삽니다. 올바른 방식으로 충족이 안 되면 애꿎게 남편과 자식만 쥐어 잡는 것입니다.

그 파워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남편한테 돈 벌어 오라고 꼬집고 자식들 공부 잘해서 나를 만족시키 라고 막 푸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대원칙은 내 파워 욕구는 내가 충족 시켜야 되고, 아이들이나 남편을 통해서 충족시키려고 하면 안 됩니다.

3) 사람과 소속의 욕구
사람과 소속의 욕구도 굉장히 큽니다. 전업 주부의 경우는 소속의 욕구를 느끼기가 무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모임을 만들고 거기서 회장도 하고 총무도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교회가 이런 소속의 욕구를 충족 시키는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합니다.

권사 등의 타이틀을 주면 훨씬 파워 욕구를 느낄 수 있고 소속의 욕구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기능이 중요한 부분 이라고 생각합니다.

4) 재미의 욕구
우리는 재미의 욕구가 있어야지 삽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 일에 재미가 없다 그러면 그 분은 돈은 많이 벌지라도 재미 욕구는 충족이 안 됩니다. 그러면 다른데서라도 충족을 시켜줘야 합니다. 오늘날은 재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길이 굉장히 많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도 워낙 발달해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꾸 아기를 낳아서 그 아기가 자기 장난감 처럼 갖고 놀았습니다. 그런면도 있습니다.

5) 자유의 욕구
그 다음에는 자유의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의 욕구가 있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면 다 헛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시간이나 내 뜻을 내 마음대로 펼칠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어쩌면 노예 같은 존재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세대 간 전체적인 흐름이나 분위기는 있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젊은 사람이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굉장히 수직적입니다. 어항에 물이 있을 때 어항의 물고기들은 그것을 못벗어 납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자유로워도 이 분위기가 굉장히 경직되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여기를 떠나면 많이 느낍니다. 이 속에 있을 때는 잘모릅니다. 이게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힘의 욕구를 지금 나에게 부리시는구나 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내가 이것을 표현하면 아버지로부터 수용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내가 더 안 좋겠다 라는 것을 느낄 때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있어서 이해하는 것 하고 관계에서 이것을 어떻게 해야할 지 이해하는 것은 다른 차원인 것 같습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이런 것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빠들이 절대적으로 군림한다고 할 때는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 인간 발달의 시기적 구분
인간 발달의 시기적 구분에서 에릭슨(Erik Erikson)은 인생을 8주기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에는 인간이 이 세상에 대한 기초적 신뢰(구강 감각기)를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율성(근육 항문기), 주도성(운동 남근기), 근면성(잠재기)은 초등학령기에 해당됩니다. 청소년기의 정체성, 성인 초기 대학생 때는 친밀감을 배웁니다. 우리가 대학교 들어가서 공부해서 직업을 얻고 연애해서 결혼을 합니다. 이성에 대한 친밀감, 혹은 우정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성을 말합니다.

성인 중기에는 내 인생이 죽어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인생이 그저 나와 내 가족에 국한 되서는 안 되겠구나, 내 인생이 보다 넓은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하겠구나를 깨닫고 생성감 이라는 것은 이 사회와 후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역할들을 생성감(Generativity)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Generativity은 사실 영어 단어로는 없고 에릭슨이 만든 단어 입니다.

이것은 크레이티브 하기도 하고 뭔가를 기여한다는 의미로 번역을 생성감 등의 여러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중기 까지는 이렇고 노년기에 발달 과업은 무엇일까를 보면 자아통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아통합은 비록 내가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한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바라던 길은 A였지만 어쩌다 보니 B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이러한 기쁨이 있었고 내 인생이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았다고 전반적으로 분열 없이 통합적으로 나를 수용하는 것이 노년기의 덕목이라고 에릭슨은 설명하고 있습니다.